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와 안디아모의 동행
1995년생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는 이동하는 삶을 긍정한다. “집,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이 더 큰 편이에요. 예전부터 여행하는 걸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죠. 그런 면에서 연주자의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습니다.” 벌써 4년째 베를린에 머물고 있는 그는 점점 더 많아지는 전 세계의 부름에 성실히 응하며 자기만의 선율을 전파하고 있다. 촘촘한 해외 스케줄에도 벅찬 마음으로 서울, 대전, 춘천 등에서 모국을 위한 공연을 선보이며 전성기를 만끽하고 있는 양인모가 지난 6개월간 이어진 <보그>와 보테가 베네타의 ‘안디아모와의 동행: ICONIC JOURNEY’ 프로젝트에서 마주하는 마지막 주인공이다.
<보그> 촬영을 위해 보테가 베네타의 의상을 피팅하며 지나치게 패셔너블하거나 고루하지 않은 적절한 무대의상을 고르는 일의 어려움을 터놓았다.
정말 어렵다. 개인적으로 소재가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 어깨는 잘 받쳐주어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때 편안한 느낌이 드는 의상을 선호한다. 가끔씩 연주 성격에 따라 색깔을 가미하는데 확실히 여성 연주자에 비해 남성 연주자의 의상은 제한적이다. 그래도 동시대 연주자들 사이에서 스타일에 관한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가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흥미롭다. 무대에서 빨간 셔츠만 고수하는 내 친구처럼 말이다. 나 역시 나와 잘 맞는 의상을 계속 찾아가는 중이다.
팔목의 타투와 장발이 눈에 띈다.
머리카락은 이 정도 길이가 딱 좋다. 더 길러본 적도 있지만 너무 관리하기 힘들었다. 타투는 팬데믹 시기에 한국에서 친구들과 같이 했다. ‘리벤젤러(Liebenzeller)’라고 새겼는데, 독일에서 생산되는 프리미엄 송진 브랜드를 의미한다. 인생 첫 타투로 내게는 도전과 용기가 떠오른다.
지난 7월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스위스 로망드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펼쳤다. 해외 순회공연 중에도 틈틈이 서울, 대전, 춘천 등에서 공연을 선보였는데, 고국인 한국에서의 공연은 아무래도 느낌이 다른가?
한국은 내 커리어가 시작된 곳이자 팬이 가장 많은 곳이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나라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큰 만큼 가장 많이 긴장하게 되는 곳이다. 다른 곳보다 많은 자유가 주어지는 편인데 그래서 더 잘하고 싶고, 더 기대된다. 이번 공연을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열광적인 한국 청중을 로망드 오케스트라에 소개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뿌듯했다.
8월 28일 영국의 세계적인 클래식 축제 BBC 프롬스 데뷔 무대를 앞두고 <보그>와 마주했다. 이 퍼포먼스를 위해 특별히 준비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유튜브로도 자주 본 무대이고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이 무대에 서는 것을 엄청난 영광으로 여기고 있다.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도 의미가 크다. 음악을 사랑하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는 것이 이 축제의 취지로 공연장 규모도 크고, 티켓도 굉장히 저렴하다. 그만큼 정말 축제 같은 분위기여서 직접 무대에 서면 초현실적인 기분이 들 것 같다. 사라사테의 ‘카르멘 환상곡’을 선보이는데, 돌이켜보니 중학교 때 이후로 한 번도 연주해본 적 없는 곡이다. 잘 준비해서 좋은 추억을 남기고 싶다.
최근 가장 만족스러웠던 무대를 꼽는다면?
지난해 핀란드에서 평소 연주가 잘 안되던 곡에 도전했는데 연주가 만족스러워서 기억이 남는다. 바로 그 전에 있었던 BBC 필하모닉과의 협연도 그렇다. 하필 공연장이 공사 중이어서 체육관의 농구 코트에서 연주했는데 의외로 아주 즐거웠고, 색달랐다. 소리도 생각보다 잘 울렸다.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관객도 많았기 때문에 더 뜻깊은 시간이었다.
4년 전 기타리스트 박종호와 한국의 민가사섬 한복판에서 공연을 했고, 크루즈에서도 공연한 적 있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무대는?
청중과 가까운 무대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양로원에서 연주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왜 음악을 하고 있고 해야만 하는지, 개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을 안겨준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꼭 서고 싶은 무대가 있다면?
시벨리우스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로 연주 기회가 많이 늘었지만 여전히 꿈의 무대는 많다. 맨 처음 라이브로 듣고 전율을 느꼈던 베를린 필하모닉과의 협연도 고대한다.
대중이 ‘양인모’라는 연주자를 머릿속에 분명히 각인한 계기는 두 번의 콩쿠르 수상일 것이다. 고난도 레퍼토리로 유명한 파가니니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와 깊이 있는 해석 능력을 중시하는 시벨리우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1위를 거둔 후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훌륭한 타이틀이 생겼고 더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니 감사하다. 콩쿠르란 것이 아무리 잘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많고, 운과 타이밍도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다행이기도 하다. 파가니니 그리고 시벨리우스라는 두 작곡가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웃음)
그 후 섬세하고 따뜻한 연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 인터뷰에서 “예쁜 소리만이 아니라 소음처럼 느껴지는 더 다채로운 범주의 연주까지 포용해야겠다”거나 “예전엔 설정한 아이디어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갈고닦았다면, 지금은 하나의 정답만 두는 방식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얘기하며 새로운 소리에 대한 갈망을 드러냈다.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 따른 자연스러운 변화일 것이다. 연주를 거듭할수록, 함께 연주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쌓일수록 내 소리를 더 잘 듣게 된다. 이를 의식하며 이제까지 세워온 규칙을 최근 들어 조금씩 깨고 있다. 내가 지금 듣는 소리가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가끔 어린 시절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좋아서 연주하던 그 느낌이 무척 그립다. 더 아이처럼, 더 자유롭게 연주하기 위해 신선한 시도를 해보는 중이다.
최근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충격을 안겨준 연주자가 있다면?
늘 있는 편인데, 최근에는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와 함께 연주한 순간이 유난히 인상적이었다. 그의 연주를 바로 옆에서 들으면서 내가 평소에 레코딩이나 관객석에서 듣던 카바코스의 소리와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멀리서 들을 땐 아름답게만 느껴졌는데 가까이에서 들으니 아주 많은 소음이 느껴졌다.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이제까지는 지저분한 소리를 기피했다면, 앞으로는 그런 소리에도 친숙해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후 그런 것들을 염두에 두고 연습하다 보니 낼 수 있는 소리의 지평이 넓어진 듯하다.
팬데믹 시기 사운드클라우드에 로우 파이(Low-Fi)로 작곡한 곡을 업로드하거나, 중세 시대 독일 수녀원장이 남긴 시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앨범 <현의 유전학>을 발표한 데서 실험 정신이 느껴졌다.
평소 음악을 가려서 듣지 않기도 하고, 다른 장르에도 관심이 많다. 즉흥연주도 흥미롭다. 앞으로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클래식 외에 다른 장르의 음악가들과도 자주 협업해보고 싶다.
맨 처음 연주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왜 다른 악기가 아닌 바이올린이었나?
운명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다. 부모님이 맨 처음 권유한 악기가 바이올린이었고, 다른 악기를 연주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올린이 좋아서 지금까지 계속해왔다. 내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악기가 어느 날 나에게 주어졌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재능을 확신한 순간은 언제인가?
콩쿠르에 나가 좋은 성적을 받으면서 ‘그래도 내가 평균 이상은 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내 연주에 대한 확신이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고, 미국과 독일 등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를 깨달았을 때, 앞으로도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을 때 비로소 이 길을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의 삶에서 가장 아이코닉한 순간을 꼽는다면?
최근 기억을 되짚어보면 가장 임팩트 있었던 순간은 아무래도 시벨리우스 콩쿠르지만, 사실 한국에서의 리사이틀은 매번 특별하게 느껴진다. 청중의 집중도가 정말 남다른데, 나와 청중이 내뿜는 극한의 집중력이 만나는 순간은 경험할 때마다 전율이 온다.
이동이 많은 삶에서 받는 영감이 큰 편인가? 당신의 여정에 보테가 베네타의 ‘안디아모’ 백은 잘 어울릴 만한 아이템인지도 궁금하다.
집, 고향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이 더 큰 편이다. 옛날부터 여행하는 걸 무척 좋아했고, 지금도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한다. 그런 면에서 연주자의 삶에 만족도가 높다. 가방은 늘 악기를 메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가벼운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오늘 <보그> 촬영에서 만난 안디아모 백 같은 가방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바이올린과도 잘 어울리고, 클래식하면서 모던한 특유의 느낌이 마음에 든다. 어디에나 매치하기 좋을 듯하다.
올해 장 시벨리우스 국제 콩쿠르에서 박수예가 우승했다. 클래식계에서 다른 한국인의 활약에 긍정적인 자극을 받는 편인가?
꽤 많이 받는다. 해외 무대를 경험하며 한국인만의 음악성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만큼 더 많은 한국인이 그들이 가진 실력으로 인정받길 바란다. 또한 지금까지는 조기교육과 많은 연습량 덕분에 훌륭한 한국 연주자가 많이 탄생했고 그들 개개인이 알려졌다면, 앞으로는 한국 음악에 담긴 흥과 애절함 등의 정서까지 알려지길 기대한다.
소설을 쓰는 꿈도 있다고 들었다. 언젠가 그 꿈을 실현하면 지금 연주자로서 경험하는 것들이 소재로 쓰일까?
잡지에 기고하거나 글에 몰두해서 한창 쓸 때가 있었는데, 정말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고, 쓰는 행위 자체를 즐긴다. 연주자는 음악이라는 추상적인 예술을 어떻게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구체화할까 고민하는 사람이기에, 그런 점에서 충분히 노력한다면 글로도 잘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소설을 쓴다면 음악보다는 ‘소리’ 자체에 집중하고 싶은데, 단순하게 돌아보기론 소설 <향수>처럼 모두를 매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소리를 찾는 여정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올해 남은 시간은 어떤 것으로 채울 계획인가?
한국에서 예정된 공연이 꽤 많다. BBC 프롬스 페스티벌을 마치고 귀국해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하고, 11월에는 정명훈 지휘자와 함께 대구에서 실내악을 선보인다. 12월에는 독주 리사이틀을 한다. 텔레만의 무반주 환상곡을 선보일 계획인데 정말 오랫동안 준비해온 무대라 기대가 크다. 그 외에도 프라하, 리투아니아 등 동유럽에서도 공연을 많이 한다. 바쁜 시기지만 무엇보다 한국에 자주 올 수 있어 기쁘고, 이렇게 연주 일정이 계속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할 뿐이다.
당신이 음악을 통해 꾸는 꿈은?
음악을 통해 먼 곳까지 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음악은 우리의 가장 은밀하고 연약한 부분까지 어루만지며, 법과 제도가 작동하기 어려운 사회의 아주 소외된 영역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전파하는 힘을 가진다. 우린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뭘 먹고 살까, 어떻게 살까 고민하며 보내지만, 음악과 예술을 통해 비로소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이 내가 기대하는 음악의 역할이다.
*’안디아모와의 동행: ICONIC JOURNEY’는 5인의 컬처 아이콘(최수진, 김희천, 문소리, 김수자, 양인모)과 함께한 <보그>와 보테가 베네타의 협업 프로젝트입니다. 이탈리아어로 ‘가자(Let’s go)’라는 뜻이 담긴 안디아모(Andiamo) 백을 서로 다른 컬처 아이콘의 시선으로 재해석한 특별한 콘텐츠는 <보그>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