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그 연애소설] 민지형의 ‘솔직한 얘기’
연애도 일종의 판타지라면, 마음껏 기대하고 상상하는 쪽을 택하겠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모호한 사랑의 감각을 의미심장하게 곱씹고 더듬는 김기태, 김초엽, 민지형, 박상영, 원소윤, 장강명, 정세랑, 천선란 작가의 초단편소설처럼.
솔직한 얘기
재성은 이제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 방에 들어갔을 때는, 솔직히 놀랐다. 어둡고 쿰쿰한 룸의 찐득한 책상 위에다 스타벅스처럼 노트북과 다이어리를 펴놓은 건 처음 봤으니까.
“내가 시키는 건 다 하는 거지?”
안경 낀 마른 여자가 무표정하게 말했을 때, 재성은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선택권이란 게 있었다면 이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자, 둘이 키스해.”
여자가 말했다. ‘키스’는 이 방에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주문 중 하나이기 때문에 별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대상이다. ‘둘이’라니, 그러니까···
“얘랑 나랑?”
재성과 함께, 지난주에 들어온 신입이 여자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조금 전, 재성은 언제나처럼 ‘태오’라고 자신을 소개했고, 녀석은 ‘윤후’라고 말했다. 밖에서 봤으면 이런 데서 일할 것처럼 보이지 않을 애였는데, 아마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
대체 왜? 악취미인가? 아니면 변태? 베테랑으로서 유연한 대처를 고민하는데, 의욕이 앞서는 신입이 각오가 됐다는 눈빛으로 팔을 뻗어왔다. 하··· 어쩔 수 없이 재성은 신입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고서 가볍게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여자는 그 모습을 말 그대로 코앞에서 직관했다.
“에이, 그건 뽀뽀고. 키스.”
여자가 웃음기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쯤 되니 재성도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더 불쾌한 상대와도 얼마든지 키스해봤어···라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재성은 눈을 질끈 감고 ‘윤후’의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물론 그간의 불쾌한 상대들은 최소한 여자긴 했다. ‘윤후’의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져왔지만 재성은 ‘호스트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이 형님이 한 수 가르쳐주마’라는 자세로 몰입했다. 끈적하고 질척한 소리가 룸 안에 울렸다. 집요하게 츕츕거리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자, 여자가 만족한 듯 웃는 소리가 들려서 드디어 입술을 떼었다.
“이런 거 왜 시키는데요? 누나 변태예요?”
솔직히 누나가 아닐 것 같았지만, 일단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 얘 볼 때마다 기분이 어떨 것 같아?”
뭘 어때. 아무 생각 없겠지. 이 일을 떠올리면 기분 더러울 것이고. 재성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듣고 싶은 말이 뭔데요?”
“솔직한 얘기가 듣고 싶은 거야.”
이 방 안에서 솔직함 같은 걸 기대하다니, 변태긴 해도 생각보다 순진하시네.
“그런 거 물어보는 사람이 첨이라서요. 누나 쫌 이상한데, 쫌 귀엽다.”
‘윤후’는 아직도 넋이 나간 것 같았기에 재성이 능수능란하게 플러팅을 투하했다. 이 안에서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같은 말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여자는 마음의 벽이 살짝 허물어졌는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나··· 소설 쓰거든. BL이라고.”
“아···! 들어봤어요.”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진짜 잘 팔려. 그걸로 떼돈 벌었음. 근데··· 막혔어. 새 연재 시작해야 되는데··· 그래서 와본 거야. 둘 다 호스트인데 손님 때문에 억지로 키스하고 나서 보니 끌려서 사랑하게 됐다··· 이런 스토리 어때? 말이 되는 것 같아?”
그 말에 벌써 ‘윤후’의 호흡이 가빠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재성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눈짓했다.
“진짜 솔직히?”
“응.”
“말도 안 되지. 뭔 소리 하는 거야.”
“히잉···”
그러자 여자가 어울리지 않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웃긴 여자네?
“누나, 남자 잘 모르죠?”
“꼭 알아야 돼? 어차피 내가 쓰는 남자들은 다 가짜야!!”
의외로 통찰력이 있는 말을 해서, 재성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렇다면야, 마음대로 하세요. 그런 척은 해줄 수 있으니까.”
그러자 여자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와, 진짜? 고마워! 그렇게만 해주면, 나 팁도 두둑이 내고 또 올게. 양주도 시킬게!”
너무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표정에 재성은 반사적으로 웃고 말았다. 아니, 그보다는 팁과 추가 주문, 재방문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곧 재성은 여자가 원하는 대로 자신이 ‘윤후’와 사랑에 빠졌다고 가정하며 그를 욕망하고, 그 감정을 부정하고, 그래서 괜히 폭력을 휘둘렀다가, 결국엔 후회하는 호스트 역할에 몰입하며 여자의 소설 줄거리를 함께 고민했다. 들을수록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가 다 있나 싶었지만, 들떠서 조잘거리는 여자의 얼굴이 솔직히, 조금 귀여웠다. 지겨운 일터이자 무대인 룸 안에서는 좀처럼 들지 않는 생각이었다. 더 웃긴 건 이 여자를 기쁘게 하려면 저놈의 그곳에 닿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짐승이 되어야 한다는 거였다. 말하자면 오늘의 연극은 조금 다른 레퍼토리였다. 게다가 그게 가짜인 걸 여자도 알고 나도 안다. 그래서인지, 하면 할수록 ‘태오’에서 재성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왠지 초조해졌다. 여자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추듯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보다가 재성은 보란 듯 ‘윤후’의 손에 손깍지를 끼며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자가 웃었다. 재성은, 기뻤다. VK
민지형 은 장편소설 <나의 완벽한 남자친구와 그의 연인> <망각하는 자에게 축복을>을 비롯해 TV 드라마 <레버리지: 사기조작단>의 각본을 썼다. 출판사 라우더북스를 설립해 앤솔러지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를 기획하고 작가로 참여했다. 2019년 장편소설 데뷔작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는 2021년 동명의 웹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